라자르 페롤은 그래, 라고 답하지 않았던 몇시간 전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. 거절했던 이유는 간단했다. 일이 밀려있어서였다. 그러나 오늘 안에 다 끝내리라 마음먹었던 일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내일까지 미뤄졌고 시간은 겨우 여덟시를 조금 넘었을 뿐이다. 이럴거였으면 차라리 오늘 함께 술을 마시는 건데. 여태 자신이 뭘 한 건가 후회가 들었다. 지금 와서 함께 마시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. 그가 거절하자마자 연인은 그럼 다른 사람과 마시러 갈게요 하고 약속을 잡았고, 두 시간 전 쯤 오늘 선배들이랑 술을 마셔요. 들어갈 때 연락할게요. 라는 문자를 보냈다. 염치불구하고 그냥 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사회적 지위가 허락지 않았다. 그는 교수였고, 연인과 함께 술을 마시는 선배들은 자신의 과 학생들이었다. 그 중에 둘은 현재 그의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이었다. 학기가 진행되는 중에는 학생들과 사적인 자리를 가지지 않는 게 그의 원칙이었으므로-그는 자신이 학생을 편애한다는 소문이 돌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- 어쩔 수 없이 손만 빠는 신세가 되어버렸다. 얼마나 마셨으려나. 많이 마시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자신과 술을 마시자고 할까. 마음같아선 그러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신이 로낭의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. 어쩌지. 고민하던 페롤은 폰을 꺼냈다. 뭐 하는지 물어나 보자. 술 잘 마시고 있으면 계속 마시라고 하면 되는거고.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꼴이 다소 구차했지만 잠시 체면은 밀어두기로 했다. 술 잘 마시고 있어? 짧은 문자를 보내고 페롤은 주머니에 다시 폰을 넣었다. 저녁을 먹지 않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.
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사와서 먹는 동안 페롤의 폰은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. 기대는 곧 걱정으로 바뀌었다. 바로 답장이 오긴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감감무소식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. 페롤은 다시 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. 액정에 뜬 시간은 벌써 아홉시였다. 전화를 할까. 집착처럼 느껴지면 어쩌지. 이제 겨우 한시간 연락이 안 된 것 뿐인데. 그러다가 혹시 그들에게 우리 관계가 들키면 그게 더 곤란할지도 모르고. 사실 난 들켜도 상관없는데. 그렇지만 로낭과의 관계가 소문이 날 경우 로낭에 대한 추문이 돌지도 모른다. 이건 상관이 있었다.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보니 폰을 들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십여분이 지나있었다. 페롤은 한숨을 쉬었다. 자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.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고 집에나 가자. 때가 되면 연락이 오겠지. 페롤은 가방을 챙겼다. 내일은 오전수업이 있는 날이니 이 이상 지체하면 내일에 지장이 생길 것은 자명했다. 선배들이랑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.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해도 연락한통 없는 연인에게 섭섭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.